고려 유적지

부석사 무량수전

■ 개 요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이 집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응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되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앞쪽으로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다. 좌우에 보조하는 협시보살 없이 부처님 홀로 계신 상태에서 동쪽을 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즉 부석사는 서방 정토 아미타여래(무량수부처님)를 모시는 도량이니만큼 부처님이 서방에 계시는 부처님이니 무량수전 안의 부처님도 서쪽에 안치시키고 동쪽을 바라보게 한 것이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길게 늘어선 기둥을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넓게 퍼진 대신 깊이가 얕은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잛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 있게 짜맞춰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장 가구에서 고저
이렇게 천장을 노출시키려면 각각의 부재가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야 하고 또한 정확하게 짜맞추어야 하므로 품이 훨씬 더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목수들은 이러한 건물을 많이 지었다. 특히 고려시대 주심포 집들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것이 많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던 모양이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 역사음미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조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 ·조사당(국보 19)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 ·석조여래좌상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 ·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 ·취현암(醉玄庵) ·범종루(梵鐘樓) ·안양문(安養門) ·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 ·무염국사(無染國師) ·징효대사(澄曉大師) ·원융국사 ·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


경북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태장리(台庄里) 봉정사에 있는 고려 말기의 건축물. 국보 제15호.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 집. 1972년 해체˙수리할 때 중앙칸 종도리(宗道里) 밑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368년에 옥개(屋蓋) 부분을 중수(重修)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건립연대는 그보다 100∼150년 정도 앞섰으리라 짐작된다. 건물의 전면(前面)에만 다듬질된 석기단(石基壇)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배열하여 주좌(柱座)만을 조각하였고, 초석 위에는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극락전 전면과 측면 중앙칸에 판문(板門)을 달았고 전면 양협간(兩夾間)에는 살창을 달았는데, 전면의 판문과 살창은 수리할 때 복원된 것이며 수리하기 전에는 3칸 모두 띠살 4분(分) 합문(閤門)이 달려 있었다.

수덕사대웅전(修德寺大雄殿)


충남 예산군 수덕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건조물. 국보 제49호. 정면 3칸(5.454`m), 측면 4칸(7.272`m)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집. 가구수법(架構手法)이 부석사 무량수전과 흡사하며 세부양식 역시 비슷한 점이 많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그 구조˙장식˙양식˙규모˙형태 등에서 발견되었다. 외관은 각 부재(部材)가 크고 굵기 때문에 안정감이 있어 보이고 측면은 특히 아름답다. 약간 배흘림을 가진 기둥을 연결하는 경쾌한 인방(引枋), 고주(高柱)와 평주(平柱)를 잇는 퇴보, 고주간을 맞잡는 대들보 등의 직선재(直線材)와 이들을 지탱하는 다분히 장식적인 포대공(包臺工), 그리고 곡률(曲率)이 큰 우미량(牛眉樑)들이 이루는 조화와 이들이 흰벽을 구획한 세련된 구도는 한국 고건축(古建築)의 아름다움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것이다. 또한 건물의 건립연대(1308)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서 다른 건물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해인사 장경각(장경판전)


장경판전은 장격각 또는 판당으로도 불린다. 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판 8만여 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3년(1457)에 판전 40여 칸을 중건하였다.
성종 19년(1488)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1488년 조선초기에 건립된 후 여러차례 큰 화재가 있었으나 단 한 번도 화재나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단 한자도 오자나 탈자 없이 모두 정밀함과 완벽함으로 그 명성은 세계적이다.

판전일곽은 50m가 넘는 긴 마당둘레에 배치된 4동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안쪽에 해당하는 북쪽의 긴 건물이 법보전이고, 바깥쪽에 해당하는 앞의 건물이 수다라전이다. 이 두 건물의 동쪽과 서쪽 끝 사이에 있는 작은 두 동의 건물은 각각 동사간전, 서사간전이라고 한다.

건축방식은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추구하였고, 장식적인 의장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전면과 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는 판전의 내부가 통풍, 방습, 실내온도 유지, 판가의 진열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것이다. 약 500년전에 세워진 판전건물이 기둥하나 기울지 아니하였고, 판가 등 진열과 판각작업을 할 때의 통행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배려를 한 것이다.

판전 건물은 가야산 중턱 서남향으로 위치해 있다. 서남향은 뒤쪽의 어느 봉우리와도 일직선의 축을 형성하지 않는 좌향이다. 해인사 주변에 부는 바람의 주방향인 동남향과 달리 서남향으로 건물이 들어섬으로 남쪽 아래에서 타고 올라오는 습기 찬 바람이 자연스럽게 판전을 돌아 옆으로 비스듬히 스쳐지나가게 한 것이다. 또 남쪽 아래가 열리고 북쪽이 높게 막힌 판전 주변의 지형은 판전 뒤에서 북풍이 걸리지게 만든다. 판전 건물의 좌향은 일조와도 상관이 있는데, 주변 어느 곳에서도 영구 음영이 생기지 않는 것이 판전의 일조환경 조절에 중요한데, 모든 방향에서 건물 주위로 햇볕이 들어오도록 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정남향에서는 건물 북쪽에 영구 음영이 생긴다. 또한 판전이 있는 655m 지점은 계곡에서 불어 올라온 공기의 습도가 어느 정도 떨어지는 고도이기도 하다. 이는 건물 내부의 적절한 습도 유지, 원활한 통풍과 직결된다.

판전 내부를 보면 직사광선이 비쳐 경판이 상하지 않도록 진열대 사이의 간격을 3m 거리를 두었고, 또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받지 않도록 지상에서 30cm 위치에 진열대를 세워 놓았다. 남쪽 건물인 수다라전의 동남쪽 건물인 수다라전의 동남쪽 창은 창살이 굵고 큰 데 비하여, 북쪽 건물인 법보전의 창은 작고 좁아 대비되는 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공기의 원활한 흐름과 장경각 내의 적정온도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산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수다라전 아래 남쪽면 넓은 창을 통해 들어와 진열대를 지나 북쪽면 작은 창으로 일부가 빠져나가고, 나머지는 다시 벽면을 타고 북쪽면 작은 창으로 일부가 빠져나가고, 나머지는 다시 벽면을 타고 위쪽 큰 창문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이렇게 빠져나간 바람은 또 다시 법보전 아래 남쪽면 넓은 창을 통해 들어가 수다라전 에서와 같은 공기의 흐름이 반복되어 완벽한 통풍을 기할 수 있는데, 실내온도는 외부온도보다 0.5~2℃ 낮게, 습도는 5~10% 낮게 유지된다.

또한 판전 내의 습도를 조절하기 위해 판전 바닥의 훍에 숯과 소금, 횟가루, 모래, 찰흙 등을 섞어 지반을 다졌다. 이것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주는데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할 때는 습기를 내뿜는다. 이러한 흙의 자동 습도조절기능으로 경판이 변형을 막는 동시에 해충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영남루


영남루(보물 147호)는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742∼765, 재위)때 이 자리에 세워졌던 영남사(嶺南寺)가 폐사(廢寺)되고 흔적만 남게 되자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4년(1365)에 당시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신축하여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한 것이다.
조선(朝鮮) 세조(世祖) 5년(1459)에 밀양부사 강숙경(姜淑卿)이 규모를 크게 하였고, 중종(中宗) 37년(1542)에 밀양부사 박세후(朴世煦)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화(兵火)로 타버렸다. 그 뒤 인조(仁祖) 15년(1637)에 밀양부사 심흥(沈興)이 다시 중건하였고 헌종 8년(1842)에 실화로 불에 탄 것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현종 10년(1844) 다시 개창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죽서루


소 재 지 : 삼척시 성내동 9-3번지
관동은 강원도 일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관령의 동쪽이란 뜻이다. 이 관동지방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8개의 곳을 가리켜 관동8경이라 하는데, 이중 그 절경이 가장 아름다워 정철의 관동별곡에서 관동의 제1루라고 칭송되는 곳이 삼척시 성내동의 죽서루이다. 죽서루를 관동 제1루라 부르는 이유는 관동8경 중 7경은 전부가 대해를 바라보는 것을 중심으로 한데 비하여 죽서루 만은 동쪽으로 영 너머 동해의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며, 봉황산 봉우리 위에 달과 해가 떠오르는 일품 정경과, 해변을 지척에 두고 봉황산 높은 봉이 가파른 낭떠러지로 되어 바다가 보이지 않는 것과 서쪽으로 두타산과 태백산의 경승이 서로 연하여 웅장함을 자아내고, 절벽아래를 흐르는 오십천의 맑고 깨끗한 물굽이, 절벽사이에 피는 꽃으로 이곳을 찾는 이를 무아의 경지로 이끌기 때문이다.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원년(元年)(1275) 학자(學者)인 이승휴(李承休)(1224∼1300) 선생(先生)이 벼슬에 뜻이 없어 두타산(頭陀山) 아래에 은거(隱居)할 때 창건(創建)하였고, 조선(朝鮮) 태종(太宗) 3년(1403) 삼척부사(三陟府使) 김효손(金孝孫)이 중건하였다 하며. 누 동쪽 죽림에 죽장사가 있어 죽서루라 이름하였다 하고, 또한 누 동쪽에 명기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도 한다.
그 후 조선 태종3년(1403)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한 이래 10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십천 층암절벽 위에 세운 이 누는 자연암반을 초석으로 삼고 암반 높이에 맞춰 길고 짧은 기둥을 세운 5량 구조의 팔작집으로 공포에서는 익공계수법과 다포계수법이 혼용되었다. 천장의 구조로 보아 맞배집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조선 후기까지 여러 번의 수리로 많은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액 중 “제일계정”은 현종 3년(1662) 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는 숙종 37년 (1711)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는 헌종 3년(1837) 부사 이규헌이 쓴 것이다. 이 밖에 숙종(1674 -1720년) , 정조 (1776 -1800년)와 율곡 이이(1536 -1584) 등 많은 명사들의 시액이 걸려 있다.
누의 남쪽에는 별관(別館)인 연근당(燕謹堂)이 있었다 한다. 두타산의 푸른 숲, 굽이쳐 흐르는 오십천 기암절벽 등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초지진


■ 개 요

1971년 12월 28일에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33m2 이다.
1656년(효종 7) 강화유수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다. 66년(현종) 병마만호를 두었다가 1763년(영조 39)에 첨사로 승격시켰는데 이 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兵馬僉節別使) 1명,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墩>軍) 18명, 목자(牧子) 210명, 진선(鎭船)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이 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 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와도 이 곳에서 교전하였다.
이 초지진은 모두 허물어져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3년 초지돈만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 안에는 조선 말의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는데, 포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 홍살로 되어 있으며, 대포의 길이는 2.32m, 입지름 40cm이다.
효종 7년(1656) 안산에서 이 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국방을 튼튼히 하는 차원에서 강화에 천험한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강화도 해변에 8개의 진을 설치한 것도 이러한 정책의 일부분이었다. 초지진에는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이 소속되어 있는데 이 돈대들은 숙종 5년(1679)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의 승군 8천 명과 어영군 4천 3백 명을 동원하여 40일 동안에 걸쳐 49개의 돈대를 축성할 때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 9개의 포대도 축조되었는데 초지진 남쪽 진남포대에는 대포 12문이 설치되었고, 초지진 앞의 대황산 황산포대에도 대포 6문이 설치되었다.
초지진은 신미양요 때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는데 덕진진과 광성보가 함락당하고 어재연 장군 이하 전수비군이 전사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초지진은 그러나 수난을 통해 모두 허물어졌다. 1976년 간신히 남아 있던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 위에 초지진의 초지돈을 복원하고 대포 1문을 포각 속에 전시했다. 이 돈대에는 3개소의 포좌가 있고 100여 개의 총좌가 있다. 높이가 4m 정도에 긴 축이 100미터쯤 되는 타원형 돈대이다. 성과 돈대 옆의 소나무에는 당시의 전투를 말해 주는 포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닷가에 임한 돈대가 근대사에 있어서 처절한 전쟁을 치르고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 역사음미

고려 때는 물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고 방어시설을 강화하여 외세가 밀어 닥치던 당시의 강화도엔 5개의 진(鎭), 7개의 보(堡), 53개의 돈(墩)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군 편제를 오늘의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휘부였던 진이 대대급이었다면 보는 중대급이요, 돈은 분대급의 초소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강화읍에서 301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전등사 못 미쳐 길상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광성보(廣城堡)와 용두돈대(龍頭墩臺), 초지진(초芝鎭)으로 이어진다.광성보는 강화해협에 접한 고려 때 외성이었던 것을 보수하고 성문을 건립하여 여러 돈대 들을 이에 소속시켰는데 효종으로부터 숙종, 영조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보수하고 개축해온 것이라고 하며, 성문의 문루에는 안해루(按海樓)라고 하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군과 공방전이 펼쳐졌고, 신미양요(1871)때는 미군함대에 의하여 초지진, 덕진진(德津鎭)이 점령되고 이어 광성보마저 포위되는 등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1866년에 평양에서 일어났던 셔어맨(Sherman)호 사건의 문책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5척의 군함에 1,200명의 군사를 실은 미국함대가 남양만에 정박하여 시위하고, 그중 일부가 강화의 관문인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후 북진하여 광성보를 공격하였다.당시 미군은 8~9인치 대포를 쏘아 댔으나 우리는 정조준도 안되고 사정거리도 형편없으며, 포탄이 날아간 후 폭발되지도 안는 쇠덩어리를 쏘는 것이 고작이었다.
중군장(中軍將)이었던 어재연(魚在淵)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이 200명의 휘하 군사와 함께 ‘적에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 고 결의하고 2일 동안 48시간의 사투를 벌리면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모두 무참히 전사하고 말았다.광성보에서 용두돈대로 가는 길 위에 어재연장군 형제의 순국을 기리는 쌍충비(雙忠碑)가 서 있고, 길 아래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51명의 시신을 나누어 뭍은 7기의 분묘가 있어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 광상보와 돈대는 사적 제227호이다.광성보에서 해안의 성터를 따라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은 전적지 답지 않게 숲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연인들의 산책 길이다. 좀 더 걷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길을 한참 걷다 보면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을 이용하여 설치한 천연의 교두보 용두돈대(龍頭墩臺)가 있다.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과, 신미양요 때는 미군과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현장이요,어재연장군이 지휘했던 광성보에 속한 돈대이다. 1977년에 성벽을 보수하면서 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江華戰跡地 淨化紀念碑)를 세웠다.앞의 큰 글씨는 박대통령이 썼고, 뒤의 비문은 이은상이 짖고 김현이 썼다. 이 돈대와 좀 덜어진 곳에 유명한 손돌목(孫乭項) 돈대가 있어서 두 곳이 모두 경치가 아름답기로 으뜸인데 이곳을 찾는 이들은 이곳에 얽힌 애잔한 사연들를 한번 음미해 보아야할 것이다.

용장산성


■ 개 요

전라남도 진도군(珍島郡) 군내면(郡內面) 용장리에 있는 고려시대 석축산성. 축성연대는 1270년(원종 11) 6월 이후로 추정되며, 몽골 침입에 대항하던 고려 장군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대몽항쟁을 하던 근거지였다. 삼별초는 강화(江華)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관부와 성곽을 쌓고 승화후(承和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 고려 관군과 몽골군에 저항하였으나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에게 패하였다. 그때 쌓은 성이 용장성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성의 둘레 3만 3741자, 높이 5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용장산 기슭에 석축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에 용장사터·행궁터가 있다. 임회면(臨淮面) 남동리(南洞里)의 남도석성(南桃石城)과 함께 삼별초의 대몽항쟁유적지로 귀중한 자료이다. 사적 제126호

강화산성


■ 개 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석축산성. 총면적은 307.1㎢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1234년부터 본격적 공사에 들어갔다. 고려 때 쌓은 성의 구조를 보면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의 형태를 취했는데, 이 중에서 내성이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50년 축조했으며, 길이 약 9㎞의 토성으로 모두 8개의 성문이 있다. 외성은 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각 주현의 일품군(一品軍)을 징발,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공사를 실시하였다. 몽골군을 막기 위한 중요 방위시설이었으며 강화성은 조선 초기에 다시 축성한 적이 있으나 병자호란 때 파손되고 1677년(숙종 2)에 대규모의 개축공사를 시작하면서 토성(土城)이던 것을 돌로 쌓기 시작하였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 있고 암문(暗門)이 4개, 수문(水門)이 2개 있다. 문루로는 남쪽에 안파루(晏波樓), 서쪽에 첨화루(瞻華樓), 북쪽에 진송루(鎭松樓), 동쪽에 망한루(望漢樓)가 있다. 사적 제132호.

적상산성


■ 개 요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적상면(赤裳面) 북창리(北倉里)에 있는 고려 말기 석축산성. 둘래 약 3㎞. 현재 북문지·서문지·사고지(史庫址)가 남아 있으며, 성벽은 무너져 숲 사이에서 겨우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산성은 석축으로, 둘레 약 5127m, 높이 약 2.12m였으며 성내에는 토양이 비옥한 넓은 분지가 있었고 못이 4개소, 우물이 23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1614년(광해군 6) 실록전(實錄殿)이 창건되었고, 18년 실록이 처음 봉안되었다. 41년(인조 19) 선원각·군기고·대별관이 세워지고, 43년 호국사 등이 세워졌다. 조선 말기에 건물의 보수(補修)를 위하여 고종이 보수비를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사적 제146호.

괴산미륵산성


■ 개 요

괴산은 산지가 많은 고장이다. 이처럼 산세가 수려한 고장에 산성이 없을 리 없다. 미륵산성이 그러한 예이다.
미륵산성은 낙영산(685.2m)과 도명산(650.1m)의 정상을 각각 남북으로 하여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됐다. 전체 둘레 5.1km, 외성을 합한 석축만도 3.7km에 달하는 거대한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서쪽으로 난 계곡에 수문과 서문을 내고 서문의 바깥 좌우의 기슭에 외성을 축조하여 계곡 방면을 공제하고 있으며, 성의 동문은 화양동계곡 쪽, 남문은 사담계곡 쪽에 설치되었다.
성벽의 축조는 자연 할석으로 쐐기물을 많이 사용하여 쌓고 내면으로는 2 - 3단의 계단 모양으로 쌓아 고려후기에서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축조기술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벽의 요소마다 네모꼴의 망대를 만들고 있으며 자연암반을 둥글게 파내어 기둥을 세운 흔 적이 많다. 동남쪽의 성벽 일부는 커다란 석재를 열지어 놓은 특이한 축성법을 보이고 있다. 성내에는 여러 개의 건물터가 있고 중앙부인 수정골에는 수정의 원석이 발견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성벽의 잔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며, 고려시기 대규모의 입보농성용 산성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천리장성


고려시대 거란·여진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여진족과의 국경에 쌓은 성(城). 고려는 초기부 터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해 왔는데, 1033년(덕종 2)에는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이 장 성을 쌓게 하였다. 성의 규모는 매우 컸으며 서쪽의 압록강 어귀인 흥화진(興化鎭)으로부터 맹주(孟州:孟山)·삭주(朔州) 등 성을 거쳐 정변(靜邊)·화주(和州) 등의 성에 이르고, 다시 도련포(都連浦)까지 이어지는 천여 리 되는 긴 성으로 높이와 폭이 각각 25자나 되는 석축 이었다. 1044년경 완공되었는데, 유소는 그 공으로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칭호를 받 았다. 이 장성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북방 방어선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유적은 지금도 의주(義州)·정평(定平)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윤관의 9성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분산되었던 여진은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통일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숙종 때 북만주 완옌부의 추장 영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북간도 지방으로 세력을 뻗쳐 왔고, 뒤를 이은 우야소는 다시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하여 있던 동여진을 아우르게 되자, 정주를 경계로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임간을 시켜 여진을 정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였고, 뒤를 이은 윤관의 북벌군도 여진의 기병에 패하여 철수하였다. 기병 중심의 여진군 을 보병 중심의 고려군이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윤관의 주도로 별무반을 창설하였다. 별무반은 기병 부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승병 부대인 창마군으로 구성되었다. 신기군은 문무 산관(散官)과 서리로부터 상인, 노복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로 편성하였고, 말을 가지지 않은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 응시자가 아닌 사람은 신보군에 편속시켰다.
여진 토벌은 예종 때에 이르러 단행되었다. 예종 2 년 12월에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는 17 만의 출정군은 천리 장성을 넘어 여진족의 거점인 함흥 평야와 그 이북 지방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였다.
고려는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하고 9성을 수축하였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咸州)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英州)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雄州)에 성곽 992 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福州)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吉州)에 성곽 670칸, 이주민 680 가구, 공험진에 이주민 532가구로서,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崇寧) · 통태(通泰) 진양(眞陽)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동북 9성의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 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이곳 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러나 거처를 잃은 여진족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인 한 방비의 곤란, 서북쪽 거란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 및 여진의 환부 애원으로 고려는 9성을 1년 7개월 만에 다 시 여진족에게 되돌려 주었다.

고려시대의 탑

려시대에는 신라의 불교 문화가 그대로 계승되고, 불교가 국교로 인정되면서 교세도 더욱 확장되어 석탑의 건립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의 호족들과 많은 백성들도 자신들의 염원을 담은 탑을 많이 세우면서 석탑 양식에서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신라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조금씩 변화를 보이는 고려의 석탑으로는 개심사지 오층석탑, 남계원 칠층석탑, 춘궁리 오층석탑, 천흥사지 오층석탑, 상오리 칠층석탑 등이 있다.
충남과 전북 지역에는 백제의 양식을 따른 탑이 많이 세워졌는데, 이런 탑에는 무량사 오층석탑,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공주 계룡산 남매탑,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신라시대의 특수한 형태를 계승한 사자빈신사지 석탑 같은 경우도 있으나, 고려시대에는 4각의 기본 형을 벗어난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탑에는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운주사 원형 다층석탑 등이 있다.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강원 평창군 진부면(珍富面) 동산리(東山里) 월정사에 있는 8각 9층석탑. 국보 제48호. 높이 15.2`m.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2중 기단으로 지대석은 1단의 받침이 있어 하층 중석(中石)을` 받치고 `있다. 각 면에는 1면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었으며 갑석(甲石)은 복련(覆蓮:아래로 향한 연꽃)으로 덮고, 그 위의 상층 면석을 받치는 받침돌이 있다.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갑석 위에 탑신을 괴는 받침돌이 1매 있어 첫층 옥신(屋身)을 받치는데 8면에 1면씩을 건너뛰어 4개면에 직사각형 홈이 패어져 있다. 옥개의 각 구석에는 풍탁(風鐸)이 달려 있고 상륜부도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 탑 앞에는 보살좌상 1구가 탑을 향해 안치되어 있다. 해체, 수리할 때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경천사십층석탑


고려 말에 건립된 대리석 석탑. 국보 제86호. 높이 13.5`m. 원래 경기 개풍군(開豊郡) 광덕면(光德面)에 있었는데 한말에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가 불법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 후 반환되었으나 파손이 심하여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회랑에 방치되었다가 1959~60년에 재건되었고, 다시 95년 해체된 후 문화재연구소 한국자원연구소 원자력연구소의 공동작업으로 98년까지 완벽 보존처리하기로 하였다. 석탑의 형식은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신라형식을 이은 평면직사각형이다. 당시에는 이미 새로운 양식인 다각(多角) 석탑이 나타났으나, 이 석탑은 그런 유형을 따르지 않은 특수한 형태를 갖추어 이색적이다.

금산사육각다층석탑


전라북도 김제시(金堤市) 금산면(金山面) 금산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점판암(點板岩) 석탑. 높이 2.18m. 공예적 성격을 띤 특수한 작은 탑으로, 구조 역시 특이하다. 전체 구조는 6각이며 기단부와 탑두의 상륜부는 화강석을 이용했고 탑신부는 점판암을 그대로 썼다. 기단 역시 6각의 화강석을 3단으로 조성하고 각 면에 사자를 양각(陽刻)했으며 그 위에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을 점판암 석재로 조성하여 탑신을 받치도록 했는데 현재 중석(中石)은 없어졌다. 탑신부의 옥개석은 6각의 단조로운 조형을 유지했을 뿐 별다른 조각이 없이 11층을 유지했으나 옥신(屋身)이 없고 다만 상층부에 2단의 옥신을 남기고 있다. 옥신 역시 6각이며 각면에 작은 불상을 선으로 새겼는데, 이는 옥개석 밑에 초화문과 용 등을 나타낸 수법과 같다. 이 같이 탑신과 옥개에 선각으로 장엄을 나타내는 장식적 수법은 이 탑이 공예적 소탑이란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탑두의 상륜부는 단조로운 보주 1석으로 처리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다. 원래 이 석탑은 경내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 하나 고려시대에 흔치 않은 점판암 석탑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비록 석탑의 부재가 많이 결실되긴 했으나 그 형태는 별다른 손상 없이 원형을 유지했으며, 특히 6각탑이란 점이 동일한 재료의 다른 탑과 대비된다. 보물 제27호.

운주사원형다층석탑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도암면(道巖面) 대초리(大草里)에 있는 고려시대 석탑. 높이 5.71m. 석조불감(보물 797) 앞에 있는 이 석탑은 지대석에 높직한 10각의 기단면석을 짜올리고, 그 위에 16엽 앙련이 조각되어 있는 갑석을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모두 원형이고 초층옥개 하면에 2조선이 음각되고, 2층 이상은 1조선이 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층뿐이나 원래는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형태가 이형석탑(異形石塔)으로, 고려석탑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원형다층석탑은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것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에 나타난 특이한 양식으로 볼 수 있다. 보물 제798호.

개심사지오층석탑


고려 전기에 창건된 개심사에 있던 탑이었으나,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현재는 논 한가운데에 서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4면마다 둥근 테두리 선을 새기고 그 안에 머리는 짐승, 몸은 사람인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차례로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은 4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나눈 다음 그 안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다. 팔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의 모습을 새겨놓은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기단의 맨 윗돌은 그 윗면에 몸돌을 받치기 위한 연꽃무늬의 괴임돌을 놓았는데, 이것은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한 특징이다. 사리나 법경을 봉안하는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에는 문고리 모양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모두 4단씩의 받침을 깎아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어 탑 전체에 경쾌함을 실어 준다. 기단에 남겨진 기록을 통해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세워진 탑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매우 온화하여 좋은 비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탑이다.

청량사지오층석탑


청량사터에는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등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두 탑을 가리켜 오누이탑 혹은 남매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상원이라는 승려가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자, 호랑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처녀를 업어다 주었다. 상원은 처녀와 남매로서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고, 처녀의 아버지가 그 갸륵한 뜻을 기려 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탑은 그 중 오층석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그 위에 둔 기단의 아랫돌은 각 4장의 돌로 짰다. 특이한 점은 기단의 가운데기둥을 별도의 돌로 끼워두었다는 것이다. 탑신의 각 층 지붕돌은 얇고 넓어서 균형과 안정감을 잃고 있다. 1·2층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2단인데, 모두 딴 돌을 끼워넣은 구조이다. 3·4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한 돌씩이며, 4층의 지붕돌받침은 아래층들과 달리 1단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4층 지붕돌 위에 5층 몸돌이 있으나,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머리장식이 남아 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비인오층석탑(보물 제224호)으로 이어지는 백제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와서 한 절에 각기 특징있는 두 가지 유형의 백제탑을 세운 것은 역사적, 미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청량사지오층석탑


청량사터에는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등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두 탑을 가리켜 오누이탑 혹은 남매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상원이라는 승려가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자, 호랑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처녀를 업어다 주었다. 상원은 처녀와 남매로서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고, 처녀의 아버지가 그 갸륵한 뜻을 기려 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탑은 그 중 오층석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그 위에 둔 기단의 아랫돌은 각 4장의 돌로 짰다. 특이한 점은 기단의 가운데기둥을 별도의 돌로 끼워두었다는 것이다. 탑신의 각 층 지붕돌은 얇고 넓어서 균형과 안정감을 잃고 있다. 1·2층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2단인데, 모두 딴 돌을 끼워넣은 구조이다. 3·4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한 돌씩이며, 4층의 지붕돌받침은 아래층들과 달리 1단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4층 지붕돌 위에 5층 몸돌이 있으나,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머리장식이 남아 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비인오층석탑(보물 제224호)으로 이어지는 백제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와서 한 절에 각기 특징있는 두 가지 유형의 백제탑을 세운 것은 역사적, 미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익산왕궁리5층석탑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익산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으로 이어지는 석탑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라면, 수행이 높았던 스님의 사리를 두는 곳이 부도이다. 구성은 석탑과 비슷해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게 된다.
이 부도는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원래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일제시대에 일본의 오사카로 몰래 빼돌려졌다가 반환되었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부도가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법천사터에는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선종 2년(1085)이므로 묘탑의 조성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부도 전체에 여러가지 꾸밈을 두고,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등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화려하게 꾸민 장식으로 인해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기단의 네 귀퉁이마다 1마리씩 놓여 있던 사자상은 일찍이 도둑맞아 지금은 한마리도 남아있지 않다.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


고려 목종 때의 승려인 홍법국사의 부도로,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주시)의 정토사 옛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활약하였던 유명한 승려로서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선(禪)을 유행시켰으며,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거쳐 목종 때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았다.
기단(基壇)은 네모난 바닥돌을 깐 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높직한 괴임을 두어 가운데받침돌을 올린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놓은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용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윗받침돌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솟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탑신(塔身)의 몸돌로,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다. 몸돌에는 공을 가로·세로로 묶은 듯한 십(十)자형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그 교차점에는 꽃무늬를 두어 장식하고 있다. 지붕돌은 별다른 장식은 없으나 여덟 곳의 모서리마다 꽃조각을 둔 것이 눈에 띄는데, 아쉽게도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다. 삿갓 모양으로 깊숙이 패인 지붕돌 밑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8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신라의 부도형식을 잃지 않으면서 일부분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작품으로, 제작연대는 홍법국사가 입적한 고려 현종 8년(1017) 이후로 보고 있다. 공모양의 몸돌로 인해 ‘알독’이라고 불려지기도 한 이 탑은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부도로, 섬세한 조각과 단조로운 무늬가 잘 조화되어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부도


고려 목종 때의 승려인 홍법국사의 부도로,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주시)의 정토사 옛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활약하였던 유명한 승려로서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선(禪)을 유행시켰으며,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거쳐 목종 때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았다.
기단(基壇)은 네모난 바닥돌을 깐 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높직한 괴임을 두어 가운데받침돌을 올린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놓은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용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윗받침돌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솟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탑신(塔身)의 몸돌로,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다. 몸돌에는 공을 가로·세로로 묶은 듯한 십(十)자형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그 교차점에는 꽃무늬를 두어 장식하고 있다. 지붕돌은 별다른 장식은 없으나 여덟 곳의 모서리마다 꽃조각을 둔 것이 눈에 띄는데, 아쉽게도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다. 삿갓 모양으로 깊숙이 패인 지붕돌 밑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8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신라의 부도형식을 잃지 않으면서 일부분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작품으로, 제작연대는 홍법국사가 입적한 고려 현종 8년(1017) 이후로 보고 있다. 공모양의 몸돌로 인해 ‘알독’이라고 불려지기도 한 이 탑은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부도로, 섬세한 조각과 단조로운 무늬가 잘 조화되어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고려의 종

신라의 양식을 이은 고려 초의 범종은 호국불교사상과 함께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어 개인적인 발원을 담은 주조활동도 성행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수법이나 규모에 많은 변화를 보였다. 그 가장 큰 원인은 12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이전까지 이어오던 신라의 전통에서 벗어나 예술성도 퇴화하며 왜소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구체적인 특징으로 상대에 입상화문(立狀花文)이 나타나며 정교한 조각 수법보다는 음·양각의 선적인 도형으로 형식화되어 졸렬한 느낌을 준다. 명문은 유곽 안에 위패(位牌) 모양을 조각하여 그 안에 양각하는 새로운 형식을 사용하였다.

신라범종에 비해 국내에 보존된 것이 상당히 많으며, 천흥사동종(1010년)·청녕사년명동종(1058년)·정풍이년명동종(1157년)·내소사동종(1222년) 등이 대표적이다.

성거산천흥사동종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m, 종 입구 0.96m이다.
종 위에는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신라 종의 용보다 고개를 쳐 들어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소리 울림을 도와 준다는 용통은 대나무 모양이며, 편평한 부분인 천판 가장자리에는 연꽃무늬를 돌렸다. 몸체의 아래와 위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한 너비 10㎝ 정도의 띠를 두르고, 꽃과 덩굴로 안을 채워 넣었다.

위에 두른 띠 바로 아래로는 4곳에 사각형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 가운데가 도드라진 9개의 연꽃을 새겼다. 유곽 아래에는 종치는 부분인 당좌를 원형으로 2곳에 두었고, 구슬로 테두리하고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당좌 사이에는 2구의 비천상을 두었는데, 1구씩 대각선상에 배치하여 신라종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유곽 바로 아래에는 위패형의 틀을 설치하고 그 속에 글을 새겨,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주조되고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신라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 신종 다음으로 큰 종으로 제작기법이나 양식이 고려 범종을 대표하는 종이라 할 수 있다.

여주출토청녕4년명동종


여주출토청녕4년명동종은 고려시대의 범종으로 1967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고철 수집 때 우연히 발견되었다.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의 용두(龍頭)는 신라 범종의 용두와는 달리 한 마리의 용이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용체(龍體)를 구부러뜨려 범종을 매어 달게 하고 있다. 용의 등 뒤에 있는 음통은 6단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 부분마다 보상문(寶相紋)·당초문(唐草紋)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용뉴 아래 상대(上帶)의 문양대와 천판(天板)이 접하는 경계 상에는 8개의 입화형(立華形) 뇌두문을 배치하였고 또한 상대·하대(下帶)·유곽대(乳廓帶)에는 가늘고 섬세한 연주문대(聯珠紋帶)를 돌리고 그 내부에 모란문(牧丹紋)과 당초문을 주된 문양으로 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상대 아래에 있는 사각형 유곽에는 꽃 모양으로 돌출된 유두(乳頭) 9개를 붙여놓았고, 유곽 주위에는 유곽대를 돌렸다.
종신(鐘身)에 있는 비천상(飛天像)은 이보다 48년 전에 만들어진 국보 제280호 성거산 천흥사동종이 두 군데에 배치된 것과는 달리 네 곳에 있다. 모두 구름무늬 위에 복련(覆蓮)으로 된 연화좌(蓮花座) 위에 천의(天衣)를 날리며 두신광(頭身光)을 갖추고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특히 대칭 되는 곳에 보관(寶冠)을 쓴 2위의 보살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 역시 종신 중하단에 보살상과 교대로 엇갈리게 하여 네 곳에 배치하였는데, 당좌 중앙에는 자방(子房)을 갖추고 그 주변에 복엽(複葉)의 16연판(蓮瓣)을 돌렸으며, 그 외곽도 가늘고 섬세한 연주문으로 장식하여 처리하고 있다.
종신 아랫부분 하대에 접하는 곳에는 사각형으로 구획된 방곽(方廓內)을 만들고 그 상부를 화문으로 장식하였다. 방곽 안에는 지름 1.3㎝ 크기의 글씨를 4행으로 새겨 넣었는데, 이 같은 방식은 국보 제28호 천흥사동종 또는 현재 일본 사가(在賀)현 혜일사(惠日寺)에 소장된 태평6년(太平六年, 1026)명 거제북사종(巨濟北寺鐘) 등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이 명문대가 자리한 위치는 용뉴의 용두 방향과 일치되어 유곽 바로 아래에 해당하여 제작 당시 의도적으로 이 자리를 정면으로 삼았던 듯하다.
명문은 하대에 붙여서 만든 사각형의 구획 안에 '特爲聖壽天長之願鑄成金鐘一口重一百五十斤淸寧四年戊戌五月日記'라고 새겨져 있다. 전부 4행으로 음각하였는데, 명문 중에 이 동종을 봉안한 사원이나 승려 이름 등이 나와 있지 않지만, 고려 문종 12년(1058)에 해당하는 '청녕(淸寧)'이라는 중국 요(遼)의 연호가 있어 연대가 확실한 작품이 되고 있다. 현재 이 청녕4년명동종 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된 고려 동종으로는 1010년에 조성한 천흥사동종이 유일하므로 이 동종은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 동종 가운데 두 번째로 빠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다만 일본에 반출된 고려 동종 가운데는 이 보다 빠른 시기의 것으로 영암서원종(靈巖西院鐘, 963), 거제북사종, 태평10년(太平十年, 1030)명 동종 등이 있다.
한편 명문 가운데 이 동종을 가리켜 '금종(金鐘)'이라 한 것도 처음 나타나는 용어이기에 동종의 명칭 고찰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곽 바로 아래에는 위패형의 틀을 설치하고 그 속에 글을 새겨,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주조되고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신라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 신종 다음으로 큰 종으로 제작기법이나 양식이 고려 범종을 대표하는 종이라 할 수 있다.

정풍2년명동종(正豊二年銘銅鍾(13의 部分)


고려시대. 높이 22.5cm, 입지름 16.8cm, 서울 개인소장. 이 鐘은 鐘肩의 立花장식이 뚜렷하고 鐘口가 넓어진 고려양식을 보여 주는 小鐘인데 장식무늬가 특이하여 주목된다. 上帶와 下帶는 2段의 雷文으로 장식하였는데 이 紋樣帶 안에 上帶에 12字, 下帶에 7字의 梵字가 圓圈안에 조각되었다. 上帶 밑 네 곳에 큼직한 乳廓이 있는데 雷文帶를 돌린 속에 돌기된 9乳가 있다. 유곽 밑에는 子房과 꽃잎에 모두 珠文을 장식한 8葉 연꽃으로 撞座를 삼았고 乳廓 사이 鐘身 거의 중앙부에 頭光과 身光을 갖추고 蓮花座 위에 앉은 如來像 1軀씩이 있다. 어깨에는 한 줄 聯珠를 돌리고 그 위에 花形 立飾이 돌려 있다. 정상에는 용뉴와 音筒이 있는데 용뉴는 다리가 하나 없어졌으나 힘차게 표현되었고 音筒 위에는 작은 구슬이 있어 특징을 이루고 있다.
如來像 밑에는 「正豊二年庚戌」운운의 鐘銘이 있어 고려 毅宗 11년(1157)의 鑄成으로 추정된다.

내소사고려동종(來蘇寺高麗銅鐘)


고려시대. 높이 22.5cm, 입지름 16.8cm, 서울 개인소장. 이 鐘은 鐘肩의 立花장식이 뚜렷하고 鐘口가 넓어진 고려양식을 보여 주는 小鐘인데 장식무늬가 특이하여 주목된다. 上帶와 下帶는 2段의 雷文으로 장식하였는데 이 紋樣帶 안에 上帶에 12字, 下帶에 7字의 梵字가 圓圈안에 조각되었다. 上帶 밑 네 곳에 큼직한 乳廓이 있는데 雷文帶를 돌린 속에 돌기된 9乳가 있다. 유곽 밑에는 子房과 꽃잎에 모두 珠文을 장식한 8葉 연꽃으로 撞座를 삼았고 乳廓 사이 鐘身 거의 중앙부에 頭光과 身光을 갖추고 蓮花座 위에 앉은 如來像 1軀씩이 있다. 어깨에는 한 줄 聯珠를 돌리고 그 위에 花形 立飾이 돌려 있다. 정상에는 용뉴와 音筒이 있는데 용뉴는 다리가 하나 없어졌으나 힘차게 표현되었고 音筒 위에는 작은 구슬이 있어 특징을 이루고 있다.
如來像 밑에는 「正豊二年庚戌」운운의 鐘銘이 있어 고려 毅宗 11년(1157)의 鑄成으로 추정된다.

전등사 범종


보물 제393호. 높이 1.64m, 입지름 1m. 꼭대기에는 좌우에서 쌍룡이 등을 지고 웅크린 모습으로 꼭지를 이룰 뿐, 음통(音筒)은 없다. 용머리 주위에는 복판(複瓣) 16엽의 연꽃이 둘레에 새겨져 있고 연판(蓮瓣)과 연판 사이에도 판단(瓣端)이 있어 마치 중판처럼 보인다. 종신(鐘身) 상부에는 8괘가 나열되었고 종신은 수조(數條)의 횡대로서 상하 2구로 구분한 다음, 종선(從線)으로 상하가 8개의 사각형 3획으로 마련되었다. 간지(間地)와 곽(廓) 안에 명문(銘文)이 양주(陽鑄)되어 있으며 종구(鐘口)의 선(線)과 평행되는 소문대(素文帶)가 돌려 있고 이 소문대 위에 당좌(撞座) 4개가 새겨져 있다.
형태가 장중하고 조각이 웅경하며 소리도 청아하다. 전체적인 형태에서 개성 연복사종을 연상케 하며 중국종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명문(銘文)으로 보아 1097년 중국의 허난성[河南省] 백암산 숭명사의 종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전등사에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범종은 중국 북송 철종 4년(1097, 고려 숙종 2년) 하남성 회경부 수무현 백암산 송면사에서 주조된 철제 범종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형태가 전혀 다른 중국에서 주조된 중국 종이다. 종의 용뉴에는 두마리의 용이 등진 형상을 하고 있고, 종견에는 16엽의 연꽃잎을 돌렸다. 또한 종신에는 2개에서 4개의 횡선을 배치하여 상,중,하단으로 구획하였으며 그 안에 각각 8개씩의 가사문대를 양각하였다. 종구는 팔능파상형을 이루고 있으며, 종구와 하단 가로선 사이에는 4개의 당좌(종을 칠 때 때리는 부분)가 마련되어 있다. 특히 종신 하단의 가사문대 내에는 시주인, 동역인, 장인 및 주조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 일부 명문이 남아 있어 만들어진 곳 대송 회주, 절이름 송명사, 연대(1907)등을 밝힐 수 있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의 솜씨가 버이는 이 종은 일제말기에 군수 물자로 징발 당해 전등사를 떠나 이곳저곳을 떠다니다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유물이기도 하다.

전낙수정출토고려범종


이 범종은 일본인 다까하라 히미꼬 여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 오던 중 1999년 11월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통해 기증·반환한 것으로,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의 훼손이 있기는 하나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종의 윗면은 수평에 가까우며, 어깨부분인 상대와 맨아래 부분인 하대에는 띠를 돌리고 그 안쪽으로 반원무늬와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상대와 연결된 사다리꼴 모양의 유곽 테두리에도 덩굴무늬를 얕게 조각하였으며, 유곽 안에는 작은 꽃받침을 갖춘 유두가 돌출되어 있다.

종의 약간 아래쪽 2곳에 배치되어 있는 당좌는 종을 치는 부분으로, 이중원의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덩굴무늬를 장식하였다. 당좌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며 배치된 4개의 비천상은 구름 위에 꿇어앉고 두손을 모아 합장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비천상은 다른 문양들보다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다.

종에 새겨진 기록이 없어 종의 제작년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형태와 문양 및 성분비율 등을 살펴볼 때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초에 제작된 범종으로 생각된다.

오어사 동종


신라시대 종의 형태를 하고 있는 고려 범종으로, 종의 꼭대기 부분에 종을 매다는 역할을 하는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다.
몸통부분의 위와 아래에는 횡선의 띠를 두르고, 같은 무늬를 새겨 넣었다. 3분의 1되는 곳 위쪽으로는 사각형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 9개의 돌출된 모양의 유두가 있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종을 치는 곳인 당좌를 따로 둔 것도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 종 몸통의 문양을 보면 서로 마주보고 꽃방석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보살을 새겼고, 다른 두 면에는 범자가 들어간 위패형 명문으로 장식하였다.

고려 고종 3년(1216) 주조되었고, 무게가 300근이나 되고 오어사에 달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종의 변천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려의 사찰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사원은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새롭게 많이 건립되었고, 동시에 지방에도 전국적으로 건립된 사찰이 많다. 특히 지방에 건립된 사찰들은 그 지방의 사회·경제·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하나의 도시적인 기능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사찰은 고대 사찰들과 달리 다양한 독립된 생활 공간을 가진 여러 개의 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사찰에서는 종교의식과 승려들의 수행 도량의 기능 외에도 각종 물품의 생산과 소비활동이 이루어졌고, 또 신자들의 거주공간이 필요하였다.

개태사지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완전히 물리친 후, 태조 23년(940)에 지은 절이다. 당시 절 안에는 태조의 초상화가 있어서 나라에 전쟁의 기미가 있으면 그 앞에 기원문을 올려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절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왜구의 빈번한 약탈에 의해 차츰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위치는 세종 10년(1428)에 옮겨진 것으로, 개태사 안에는 개태사지삼존불상(보물 제219호)이 있고, 이외에도 석탑과 쇠솥이 있다. 전성기에 장국을 끓였다고 전해지는 이 쇠솥은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에 이를 정도여서 수백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상의 대좌, 죽대들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반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절터에 있었던 석조불좌상 1구는 상방산의 한 암자에 안치되어 있다.

관촉사


968년(고려 광종 19) 혜명이 창건하였는데, 창건 당시 조성한 석조미륵보살입상(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바위에 불상을 조성하라고 혜명에게 명하였다. 불상을 완성하여 세우자 미간의 옥호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는데,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좇아와 예불하였으며, 그 빛이 촛불과 같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라 하였다 한다. 이 밖에도 불상에 얽힌 많은 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그 뒤 1386년(우왕 12)에 법당을 신축하였고 1581년(조선 선조 14)에는 백지(白只)가 중수하였으며, 1674년(현종 15) 지능이, 1735년(영조 11)에는 성능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과 삼성각·사명각·해탈문·현충각 등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18호로 지정된 석조미륵보살입상과 보물 제232호인 석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인 배례석,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인 석문, 그 밖에 5층석탑·사적비 등이 있다.

장육사


장육사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나옹선사가 처음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산불로 인해 불에 타고 그 후 다시 절을 세웠으나 임진왜란(1592) 때 훼손되어 다시 절을 세웠다. 광무 4년(1900)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방식으로 건축되었다. 한편 대웅전 내에는 영덕장육사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이 모셔져 있다.

단청을 금단청으로 하여 화려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색상이나 무늬가 장엄하고 거룩한데, 특히 사천장의 주악비천상과 좌우벽의 보살상벽화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덕사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회암사지


고려 말∼조선 초에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에 있던 사찰터.
1964년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1328년(충숙왕 15)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이 인도의 아라난타사(阿羅難陀寺)를 본떠 창건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이었다. 1376년(우왕 2) 나옹(懶翁)이 중건하고, 조선왕조에 들어와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명으로 정현조(鄭顯祖)가 재중창하였는데, 명조 때 보우(普雨)가 실각한 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에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절터는 남쪽 기슭 경사진 대지에 있으며, 계단상으로 8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여러 건물을 세웠던 흔적만 남아 있다.

대조사


충남 부여군 임천면(林川面) 구교리(舊校里) 성흥산(聖興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痲谷寺)의 말사(末寺)이다. 사적기(寺蹟紀)에는 527년(성왕 5) 담혜(曇慧)가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부여읍지(扶餘邑誌)》에는, 백제 불교를 중흥시킨 겸익(謙益)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두 기록이 다른 까닭은 알 수 없으나 6세기 초에 건립된 것은 확인된다. 그 뒤 고려 원종 때 장로(長老)인 진전(陳田)에 의해 중창된 이래, 여러 차례 중수 ·개수가 이루어졌다.

경국사


경국사는 북한산 동쪽에 자리한 고려시대의 사찰이다.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자정율사(慈淨律師)가 창건하여 청암사(靑巖寺)라 하였다. 이 사찰은 옛부터 정토사상에 바탕을 둔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경국사 사적기'에는 문정왕후의 중창 이후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청암사를 경국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일제 때인 1921년부터는 단청(丹靑)과 탱화 조성에 일가를 이루었던 보경(寶慶:1890~1979)스님이 60년간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새롭게 변모시켜 나갔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대통령이 보경스님의 인격과 태도에 감화되어 몇 차례나 찾아왔고, 1953년 닉슨 미국 부통령이 방한하였을 때도 이 절을 찾아왔다.

고려궁지 (高麗宮址)


강화읍 관청리, 강화산성의 북문으로 가는 도중에 고려 고종19년(1232)부터 원종11년(1270)까지 39년간 몽골의 난을 피하여 머물렀던 고려궁터가 있다.
규모는 작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었고, 도성(都城)도 지금은 ‘강화읍성’ 으로 불리는 내성만 남았지만 당시에는 중성과 외성까지 쌓아서 삼중으로 요새를 만들어 장기 저항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39년이라는 긴 항전 끝에 강토는 황폐해지고 백성은 기진맥진하여 헤어날 길이 없으므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몽골의 요구대로 스스로 성을 허물고 나와 항복한 후에 개경으로 환도하고 말았다.

그 후 빈터로 남아 있던 고려궁터에 조선 인조 때 행궁(行宮)을 건립하고 강화유수부, 규장외각(奎章外閣) 등을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함락되었으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완전 소실되는 등 수난의 역사가 거듭되었다.


강화동종

지정번호 : 보물 제 11호

동헌에서 이방청으로 가는 정원 한편에 프랑스군이 약탈해 가려다 실패한 강화동종이 종각 안에 걸려 있는데 한국종의 특징인 음통이 없고, 종 아래 부분에도 당좌가 없이 ‘숙종37년(1711)에 만들어 졌다’ 는 명문만 새겨져 있다. 꾸밈이 없이 간결한 조선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지닌 종이다. 원래 종은 강화역사관에 보존되여 있다.


외규장각(外奎章閣)

고려궁터에서 가장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외규장각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귀중한 소장품들을 약탈 당하고 건물까지도 소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하여 빈 건물만 제자리도 아닌 담장 밖에 쓸쓸히 서 있다.

임진왜란 때 각지에 있던 사고(史庫)들이 불타버리자 국가의 중요한 서적들을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강화에 보관하기 시작했으며, 궁궐도서관으로 규정각을 세웠던 정조가 이곳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짖고, 강화 안에 분산되어 있던 서책들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비롯하여 어필(御筆), 어제(御製), 의궤(儀軌), 옥인(玉印), 옥첵(玉冊), 금보(金寶)등을 서울 궁성으로부터 옮겨 보관했다.

그러나 왕실보관소로서 귀중한 자료와 보물들로 가득했던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서적 340책을 비롯한 옥책, 은괴 19상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물을 약탈 당하고 나머지는 거의 다 소실되었다.

지금도 한.불관계에 있어서 주요 현안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문화재 반환문제이다. 찾아오기가 그리 쉽지 않으리라고는 하지만 도적 질 해 간 우리 문화재가 명백한 이상 조속히 환수되어야 할 것이다.


만월대


황해북도 개성시 송악산 기슭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 919년(태조 2) 태조가 송악산 남록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건한 이래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진될 때까지 고려 왕의 주된 거처였다.

동서 445m, 남북 150m 정도의 대지에 위치한 왕궁터의 가운데는 정사를 처리하는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이 위치하였다. 회경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전면에 4개의 계단을 만들었고 좌우에는 동행각(東行閣)·서행각(西行閣)이 있었다. 회경전의 북쪽에는 고려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는 장화전(長和殿)과 비상시에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원덕전(元德殿)이 있었고, 북서쪽에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고 사신을 접대하던 건덕전(乾德殿), 희빈들이 거처하던 침전인 만령전(萬齡殿)이 있었다.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에는 사신 등이 바치는 물품을 받아들이던 장령전(長齡殿)과 뒤에 집현전(集賢殿)으로 개칭된 연영전(延英殿)이 있었으며, 회경전의 서쪽에는 왕의 침전이, 동쪽에는 세자가 거처하던 좌춘궁(左春宮)이 있었다.


황성에는 13개의 성문과 15개의 궁문이 있었다고 하며 성문 중에는 동문인 광화문(廣化門), 궁문으로는 왕궁의 정남문인 승평문(昇平門)과 신봉문(神鳳門)·창합문·의봉문(儀鳳門)이 유명하였다. 승평문은 정전인 회경전으로 연결되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신봉문이 있었고 그 동쪽에 세자궁으로 들어가는 춘덕문(春德門)이, 서쪽에 왕의 침전으로 들어가는 태초문(太初門)이 있었다. 신봉문 안에는 왕이 천자의 조서를 받들던 창합문이, 그 안에 다시 회경전의 전문(殿門;會慶門)이 있었다. 건덕전 앞에는 건덕전문·흥례문(興禮門)·의봉문이 있었으며, 의봉문 밖에 구정(毬庭)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의 회경전터에서 동벽까지 135m, 서벽까지 230m, 승평문까지 250m 정도이며, 궁궐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넓지 않은 공간에 많은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고, 문과 문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선죽교


개성직할시 선죽동(善竹洞) 자남산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
옛이름은 선지교(善地橋)라 하였으며, 다리의 동쪽에 한호(韓濩) 글씨의 비(碑)가 있다. 돌기둥과 노면(路面)이 맞닿는 부분에는 시렁돌을 철도의 침목처럼 올렸으며, 돌기둥 위에 마련된 노면에는 양쪽 가에 긴 난간돌을 놓았고 그 사이를 여러 줄의 판석(板石)으로 깔았다. 노면 위에는 교량의 난간주 구실을 하는 돌기둥을 3단으로 쌓았다.
이 다리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를 문병하고 오다가 방원(芳遠)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쇠몽둥이로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있다고 한다.

아미타 삼존 내영도


고려 14세기, 110cm×51cm, 비단에 채색,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아미타불로부터 한 줄기 빛이 뿜어져 나와 공양자를 비취고 있다. 아미타불은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부처. 그에 의해 극락정토로 이끌려가는 숨막히는 장면이다.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 불화. 고려 후기 귀족들의 염원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아울러 그들의 재력, 미적 수준들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행복만이 보장된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려면,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정성되이 외워야 한다. 이렇게 염불을 잘 한 중생은 그가 세상을 하직한 다음이나, 혹은 수행이 성숙해졌을 때 아미타불이 직접 그의 권속과 함께 마중해서 서방극락으로 맞이해 간다고 한다. 이러한 염불왕생신앙은 이미 신라 때부터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욱면의 설화에서처럼. 아미타불의 협시로 관음과 세지가 아니라, 세지 대신 지장이 등장하고 있다. 본존은 다소 정적인 모습이지만, 풍만한 얼굴, 근엄한 표정, 활기찬 어깨와 당당한 가슴, 쑥 내민 팔 등에서 건장한 장자풍 부처의 위엄이 잘 표현되어 있다 .

아미타 아미타 9존도


고려 1320년, 177.2cm×91cm, 비단에 채색, 일본 송미사 소장. 아미타 내영도에는 몇가지 형식이 있는데, 아미타불 단독으로 왕생자를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 삼존불이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불과 8대 보살이 맞이해 가는 장면, 아미타불과 25 보살 또는 많은 성중이 맞이해 가는 장면 등이 있다. 아뭏든 아미타불은 단독 예배를 위한 아미타불 존상화, 아미타 내영도, 관경변상도 등의 여러가지 모습으로 수없이 많이 그려지고 숭배되었다. 이 그림들은 왕족이나 귀족의 원당이나 사찰의 무량수전, 극락전, 아미타전 등에 봉안되었다.

수월관음도


고려 후기, 227.9cm×125.8cm, 비단에 채색, 일본 대덕사 소장. 수월관음도는 관음 신앙의 유행에 따라 사찰의 원통전의 후불화 또는 극락전에 모시는 불화로 많이 제작되었다.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준말. 대승 불교의 위로는 진리를 찾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이상 가운데 중생 제도를 몸소 실천하는 자비의 화신. 즉, 중생의 갖은 고난에 적절히 대처함으로써 모두를 구제, 안락한 세계로 인도하는 구제자이니, 관음보살만큼 진심에서 우러난 친근감과 열렬한 환영을 받은 보살도 다시 없을 것이다. 관음도의 제작에는 화엄경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이에 의하면 관음은 보타락가산에 거주하면서 중생을 제도한다. 보타락가산에는 수많은 성현들이 살고 있는데, 온갖 보배로 꾸며졌고 지극히 청정하며 꽃과 과일이 풍부한 숲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 옆 금강보석 위에는 용맹 장부인 관음 보살이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중생을 제도한다. 수월관음도는 우리 나라에서 아미타도와 함께 가장 많이 그려진 도상인데, 선재 동자, 암굴, 염주, 공양자, 보주를 든 용, 한 쌍의 청죽 등의 표현은 다른 나라의 수월관음화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특징이다. 보타락가산에 살고 있는 관음보살을 선재 동자가 방문하여 청문하는 장면을 소재로 한 도상이 널리 유행하였다. 아마도 의상이 친견했다는 낙산의 수월관음을 도상화한 것이 계속 유행하였던 것 같다.

혜허의 양류관음도


고려 후기, 혜허 그림, 144cm×62.6cm, 비단 채색, 일본 도쿄 센소지(淺草寺) 소장.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 작자를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고려 수월관음도 중에서 구도와 형태가 특이한 그림이다.
대각선적 구도는 다른 수월관음도와 비슷하지만 버들잎 속에 서 있는 입상이나 화면 오른쪽의 절벽과 대나무가 없어지고 버들잎 광배가 화면의 중심을 압도하는 구도는 이 상의 독특한 특징이다.
역시 풍만하고 여유로운 표정,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어깨의 곡선이나 완만한 굴곡을 이루는 신체의 흐름, 오른쪽으로 휘어진 늘씬한 자태 등은 당대 왕공 귀족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사경변상도


고려 1334년, 34.0×11.5cm, 보물 제752호, 호림박물관 소장.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의 경전들은 모두 필사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전을 베끼는 경서사의 공덕은 극히 강조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목판이 발달하면 대부분의 수요는 판경이 담당하게 되므로 사경의 필요성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제는 실용적인 면이 아닌 '경서사의 공덕'이라는 신앙적인 면만 강조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경들은 초호화판으로 만들어졌으니 글자는 금이나 은으로, 그림은 금니로, 바탕은 최고급 종이인 감지 같은 색지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화려한 사경들은 통일 신라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초호화판의 사경이 대량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사실, 고려의 호화판 사경들은 무수히 조성되었고,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이 변상도는 충숙왕 복위 3년(1334)에 자선대부 장작원사였던 안새한이라는 사람이 부모님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대방광불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사경한 책의 첫 부분이다.
그림은 화면 가운데에 보현보살이 위치하고, 그를 향해 합장하고 법문을 듣고 있는 보살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살들의 보관과 법의 등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필치로 정교하게 그렸고, 배경은 동일한 문양을 반복해서 채웠다.

부석사 조사당벽화 浮石寺祖師堂壁畵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浮石面) 북지리(北枝里) 부석사에 있는 고려 말기의 벽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6폭이며, 각각의 크기는 가로 75cm, 세로 205cm이다. 원래 부석사의 창건 당시 조사당 벽면에 그려져 있던 벽화인데, 현재는 이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내어 안전장치를 한 후에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안에 보관하고 있다. 조사당 벽면에 있던 원래의 위치 순서대로 열거하면 ①보살상(菩薩像), ②다문천왕상(多聞天王像) ③광목천왕상(廣目天王像), ④증장천왕상(增長天王像), ⑤지국천왕상(持國天王像), ⑥보살상(菩薩像)으로 되어 있다. 이들 벽화는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 금색, 녹색, 백색 등으로 짙게 채색하였다. 양 보살상은 풍만하면서도 우아한 귀부인상으로 정적이고도 유려한 선(線)을 잘 구사하여 그렸다. 또한 가운데의 사천왕상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모습으로, 힘차고 동적인 먹선으로 윤곽을 그렸고 그 안에 채색을 하였다. 1916년의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으로 미루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이 밝혀졌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벽화는 이 조사당벽화를 비롯해서 개성 수락암동(水落巖洞) 고분벽화, 개풍군 공민왕릉(恭愍王陵) 벽화 등이 있으나 예술적 가치나 보존 상태로 보아 이 벽화가 가장 뛰어나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남아 있는 벽화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그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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